집을 나서면서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늘 걷던 길을 따라가다가 평소에는 지나쳤던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다음 모퉁이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할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에는 머릿속을 따라오던 일들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지요.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잠깐은 발밑의 길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머뭅니다. 여러분도 무언가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동안 걸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진 적 있으신가요. 오늘 읽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방랑자」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산책을 나서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는 목소리입니다. 별이 보이는 덤불을 잠자리로 삼고, 강물에 적신 빵을 먹으며, 머리 위의 하늘과 앞에 놓인 길을 원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왜 이 사람이 그토록 길을 원하는지 잠시 함께 걸으며 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길을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내가 바라는 것은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발밑의 길뿐. 두 행을 읽으면 풍경이 단순해집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생각하던 마음으로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꾸 줄여 갑니다. 끝에 남는 것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리와 그 위로 펼쳐진 하늘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꼭 새로운 장소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그 말에 함께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원문 만나기 The Vagabond (To an air of Schubert)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Give to m...
9월도 어느새 끝을 향해 갑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는 날에도 달력을 보면 가을이 꽤 가까이 와 있습니다. 계절은 한꺼번에 바뀌기보다, 익숙한 풍경의 한쪽을 조금씩 바꾸어놓는 것 같습니다. 가을을 이야기하면 낙엽이나 쓸쓸함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오늘 읽을 시의 가을은 조금 다릅니다. 여름꽃이 진 정원에 붉은 불이 피어나고, 회색 연기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꽃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눈이 어느새 움직이는 불꽃을 따라갑니다. 『보물섬』의 작가로 익숙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에게 이런 짧은 시도 있습니다. 어린이 시집 『A Child’s Garden of Verses』에 실린 「가을의 불」입니다. 멀리 항해를 떠나는 대신, 이번에는 정원 너머의 작은 풍경을 함께 바라봅니다. Flowers in the summer, Fires in the fall! 여름에는 꽃, 가을에는 불! 시의 마지막 두 줄입니다. 어쩌면 너무 간단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 내어 읽으면, 여름이 끝났다는 아쉬움 곁에 가을을 반기는 마음도 들어옵니다. 오늘은 그 짧은 두 줄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눈길을 천천히 따라가봅니다. Autumn Fires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In the other gardens And all up the vale, From the autumn bonfires See the smoke trail! Pleasant summer over And all the summer flowers, The red fire blazes, The grey smoke towers. Sing a song of seasons! Something bright in all! Flowers in the summer, Fires in the fall! ※ ‘vale’은 ‘골짜기’를 뜻하는 시어입니다. 우리말로 다시 읽기 — 가을의 불 다른 집 정원에서도 골짜기 위쪽 곳곳에서도,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