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글

라벨이 British Literature인 게시물 표시

Robert Louis Stevenson — 아무 일정 없이, 어디론가 걷고 싶은 날, 「방랑자」

  집을 나서면서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늘 걷던 길을 따라가다가 평소에는 지나쳤던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다음 모퉁이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할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에는 머릿속을 따라오던 일들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지요.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잠깐은 발밑의 길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머뭅니다. 여러분도 무언가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동안 걸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진 적 있으신가요. 오늘 읽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방랑자」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산책을 나서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는 목소리입니다. 별이 보이는 덤불을 잠자리로 삼고, 강물에 적신 빵을 먹으며, 머리 위의 하늘과 앞에 놓인 길을 원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왜 이 사람이 그토록 길을 원하는지 잠시 함께 걸으며 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길을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내가 바라는 것은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발밑의 길뿐. 두 행을 읽으면 풍경이 단순해집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생각하던 마음으로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꾸 줄여 갑니다. 끝에 남는 것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리와 그 위로 펼쳐진 하늘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꼭 새로운 장소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그 말에 함께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원문 만나기 The Vagabond (To an air of Schubert)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Give to m...

Matthew Arnold — 「묻힌 삶」(The Buried Life),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순간

 하루 동안 많은 말을 나누고도,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꺼내지 못한 채 저녁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안부를 묻고,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하고, 가벼운 농담에 웃기도 했는데 마음 한쪽에는 무언가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감춘 말일 수도 있지만, 아직 나 자신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마음일 수도 있겠지요. 그럴 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면, 말을 하다가 문득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서운했는지,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었는지 말입니다. 상대에게 내 마음을 설명하다가 오히려 내가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오늘은 매슈 아널드의 「묻힌 삶」을 읽어봅니다. 일상 아래로 숨어 버린 마음과, 그 마음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따라가는 시입니다. 내 안에서도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 “And what we mean, we say, and what we would, we know.” “우리는 마음에 품은 것을 말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됩니다.” 평범해 보이는 말인데, 가만히 읽으면 조금 멈추게 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널드의 시는 가까운 사람과 가벼운 말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웃고 있지만 화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농담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어 달라고, 잠시 조용히 있어 달라고 청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마음을 온전히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시가 들여다보는 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있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나와, 그 삶 속에서 잘 알아보지 못했던 나 사이에도 놓여 있습니다. 원문 만나기 The Buried Life Matthew Arnold (1822–1888) 🔊 Read Poetry ※ 긴 작품이므로 중간과 후반의 세 대목을 발췌했습니다. 아래의 ‘중략’은 원문의 일부를 생략했다는 표시입니다. But o...

Thomas Hardy — 「무채색」(Neutral Tones)

  아직 10월 초순인데도 날이 갑자기 많이 추워졌습니다. 창밖의 하늘은 맑고 푸릅니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갈수록 마음 한켠에 꼭꼭 숨어 있던 먼 과거의 한때가 문득 떠오릅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이나, 이제는 갈 일이 없는 장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때 나누었던 대화는 흐릿한데, 이상하게 주변 풍경만 또렷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먼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그날의 빛이나 발밑에 떨어져 있던 잎은 떠오릅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떤 계절이 돌아오면 함께 생각나는 장면이 있으실까요. 오늘 읽을 토머스 하디의 「무채색」에도 그런 장소가 있습니다. 겨울날의 연못가입니다. 두 사람이 서 있고, 햇빛은 창백하며, 땅에는 잿빛 나뭇잎 몇 장이 떨어져 있습니다. 큰 소리로 다투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러나 몇 마디 말과 잠깐의 표정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인가 끝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시는 1867년에 쓰였고, 1898년 시집 『웨식스 시집과 다른 시들』에 실렸습니다. 열여섯 행의 짧은 시 안에서, 한겨울의 풍경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됩니다. 말보다 오래 남은 눈길 Your eyes on me were as eyes that rove Over tedious riddles of years ago; 나를 향한 당신의 눈길은 오래전의 지겨운 수수께끼를 더듬는 눈길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눈길에서 더는 반가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상대에게 나는 이미 여러 번 들여다보았지만 풀리지 않았고, 이제는 풀고 싶은 마음마저 줄어든 수수께끼가 된 듯합니다. 가까운 사이에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때에도, 뚜렷한 말보다 눈길이 먼저 달라지곤 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마주 보고 있지만 예전처럼 서로에게 닿지 않는 순간입니다. 하디는 그 변화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오래된 수수께끼를 바라보는 눈에 담아놓습니다. 원문 만나기 Neutral Tones Thomas Hardy (1840–1928) 🔊 Read Poetry ...

Alfred, Lord Tennyson —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Break, Break, Break)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을 떠올릴 때,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생각나는 날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던 말투나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웃던 소리 같은 것들입니다. 사진에는 남지 않는 그 소리가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오늘 읽을 테니슨의 시에는 여러 소리가 들립니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함께 노는 아이들의 외침, 배 위에서 부르는 젊은 뱃사람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들 사이에서 시인이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 하나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는 그렇게 바다의 소리와 한 사람의 침묵을 나란히 놓습니다. 열여섯 행의 짧은 시이지만, 다 읽은 뒤에도 파도 소리가 조금 오래 남습니다. 다시 잡고 싶은 손,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 But O for the touch of a vanish’d hand, And the sound of a voice that is still! 아, 그러나 사라진 손의 감촉이 그립구나, 이제는 잠잠해진 그 목소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말은 넓고도 막연합니다. 그런데 손의 감촉과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그리움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생깁니다. 함께했던 모든 일을 되돌려달라는 말보다, 그 손을 한 번만 더 잡고 싶다는 말이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테니슨은 젊은 시절 가까운 친구 아서 헐럼을 잃었습니다. 이 시도 그 상실과 연결해 읽혀 왔습니다. 하지만 시 안에는 친구의 이름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라진 손과 멎은 목소리만 남아 있습니다. 그 빈자리에 독자도 자신이 그리워하는 사람을 조용히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원문 만나기 Break, Break, Break Alfred, Lord Tennyson (1809–1892) 🔊 Read Poetry Break, break, break, On thy cold gray stones, O Sea! And I would that my tongue could utter The thoughts th...

John Clare —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은 날, 「나는 존재한다」(I Am!)

 누군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는데도,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꺼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했지만, 그 일을 겪는 동안 마음이 어땠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이겠지요. 가까운 사람에게도 잘 전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껴보신 적 있으실까요. 오늘 읽을 존 클레어의 「나는 존재한다」는 그런 외로움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시입니다.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탄식으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풀과 하늘 사이에서 조용히 잠들고 싶다는 바람에 닿습니다. 곧바로 위로의 말을 찾기보다,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곳까지 갔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데 I am! yet what I am none cares or knows,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도 마음 쓰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나는 존재한다’는 말만 떼어놓으면 단단한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는 닿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름이나 직업,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소개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다 하고도 아직 설명하지 못한 내가 남아 있지 않을까요. 이 시의 첫 문장은 그 틈을 아프게 드러냅니다. 클레어는 영국의 농촌에서 자라 자연의 작은 움직임을 세심하게 시에 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는 가난과 정신적 고통이 있었고, 오랜 세월 정신요양시설에서 지냈습니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첫 문장의 외로움이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시를 병력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가 남긴 말 자체에도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원문 만나기 I Am! John Clare (1793–1864) 🔊 Read Poetry I am! yet what I am none cares or knows, My friends forsake me like a memory lost; I am the s...

Emily Brontë — 낙엽이 지는 계절을 반기는 마음, Fall, Leaves, Fall

  가을로 들어서면 꽃이 진 자리보다 나뭇잎에 먼저 눈이 갑니다. 아직 푸른 잎 사이에서 빛깔이 달라진 잎을 찾아보기도 하고, 길 위에 떨어진 잎 하나에 잠시 걸음을 늦추기도 합니다. 무언가가 지고 있다는 사실이 꼭 쓸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조금 더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오늘은 낙엽이 떨어지고 밤이 길어지는 것을 기꺼이 맞이하는 시를 읽어봅니다. 『폭풍의 언덕』의 작가로 익숙한 에밀리 브론테의 「떨어져라, 낙엽이여」입니다. 여덟 행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인데, 가을을 바라보는 눈길이 사뭇 다릅니다. 꽃이 시들어도 좋고, 낮이 짧아져도 좋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걸까요. 낙엽 한 장이 건네는 기쁨 Every leaf speaks bliss to me, Fluttering from the autumn tree. 가을 나무에서 팔랑이며 내려오는 잎 하나하나가 내게 더없는 기쁨을 말해준다. 낙엽이 말을 건넨다는 표현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나무를 떠난 잎이 땅에 닿기까지, 그 짧은 움직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잎은 팔랑이고, 그 모습에서 기쁨을 듣습니다. ‘bliss’는 깊고 충만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떨어지는 잎을 보며 이토록 큰 기쁨을 느낀다고 하니 조금 뜻밖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꽃이 피는 날보다 바람이 서늘해지는 날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을 때에는 그런 마음을 먼저 떠올려도 좋겠습니다. 원문 만나기 Fall, Leaves, Fall Emily Brontë (1818–1848) 🔊 Read Poetry Fall, leaves, fall; die, flowers, away; Lengthen night and shorten day; Every leaf speaks bliss to me, Fluttering from the autumn tree. I shall smile when wreaths of snow Blossom where the rose sho...

Siegfried Sassoon — 노래가 터져 나오던 순간, 「모두가 노래했다」(Everyone Sang)

  여럿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문득 목이 메는 때가 있습니다. 가사가 특별히 슬픈 것도 아닌데, 함께 이어지는 목소리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움직입니다. 혼자 들을 때는 그냥 지나갔던 노래가 그날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오늘 읽을 시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노래하기 시작하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차오릅니다. 그런데 그 기쁨 곁에는 눈물도 있습니다. 지그프리드 서순의 「모두가 노래했다」는 열 행의 짧은 시입니다. 짧은 노래가 끝난 뒤에도 귀를 조금 더 기울이게 됩니다. 문득, 모두가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Everyone suddenly burst out singing; 모두가 갑자기 노래를 터뜨렸다. 시인은 누가 먼저 노래했는지, 무슨 노래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오래 참았던 웃음이나 울음처럼,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온 듯합니다. 이 첫 문장에는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읽는 우리도 어느새 노래가 시작된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람들의 목소리는 새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새들의 날갯짓으로 바뀝니다. 서순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의 참혹함을 시에 남긴 영국 시인입니다. 이 작품에는 1919년 4월이라는 날짜가 붙어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의 시라는 사실을 알고 읽으면, 기쁨 사이로 스치는 공포라는 말이 조금 무겁게 들립니다. 그렇다고 시 속 장면을 특정한 종전 축하 행사로 정해둘 필요는 없겠습니다. 시는 장소도, 노래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 만나기 Everyone Sang Siegfried Sassoon (1886–1967) 🔊 Read Poetry Everyone suddenly burst out singing; And I was filled with such delight As prisoned birds must find in freedom Winging wildly across the white Orchards and da...

크리스티나 로세티, 나를 잊고 행복할 수 있다면

  크리스티나 로세티, 나를 잊고 웃을 수 있다면 ― 「Remember」를 읽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부탁하게 될까요.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가끔이라도 나를 생각해달라고.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해달라고.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Remember」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떠난 뒤에도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가 끝날 무렵 그 부탁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를 기억하는 일이 당신에게 슬픔이 된다면, 차라리 잊어도 좋다고. 그리고 다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낫다고. 짧은 시 안에서 사랑의 마음이 조용히 방향을 바꿉니다. Remember Christina Rossetti (1830–1894) 🔊 Read Poetry Remember me when I am gone away, Gone far away into the silent land; When you can no more hold me by the hand, Nor I half turn to go yet turning stay. Remember me when no more day by day You tell me of our future that you planned: Only remember me; you understand It will be late to counsel then or pray. Yet if you should forget me for a while And afterwards remember, do not grieve: For if the darkness and corruption leave A vestige of the thoughts that once I had, Better by far you should forget and smile Than that you should remember and be sad. 우리말로 읽기 기억해 주세요 내가 떠나고 나면 나를 기억해 주세요. 저 고요한 땅으로 멀리 떠나...

오스카 와일드, 모든 것을 내어준 행복한 왕자

  ― 「The Happy Prince」를 읽으며 도시 한가운데 높은 기둥 위에 왕자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온몸은 얇은 황금으로 덮여 있고, 두 눈에는 사파이어가 박혀 있습니다. 칼자루에는 커다란 붉은 루비가 빛납니다. 사람들은 그를 행복한 왕자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밤, 따뜻한 이집트로 날아가던 작은 제비 한 마리가 왕자의 발밑에서 쉬어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비가 오는 줄 알았던 제비가 위를 올려다봅니다. 왕자가 울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누구보다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왕자가 왜 울고 있는 걸까요. The Happy Prince Oscar Wilde (1854–1900) 1888년에 출간된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집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에 실린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왕자는 도시 위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High above the city, on a tall column, stood the statue of the Happy Prince. 우리말로 읽기 도시 높은 곳, 우뚝 솟은 기둥 위에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온몸은 순금의 얇은 잎으로 덮여 있었고, 두 눈에는 밝은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습니다. 칼자루에서는 커다란 붉은 루비가 빛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왕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살아 있을 때는 몰랐던 것 왕자는 살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가 살던 궁전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슬픔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정원에서 놀고, 저녁에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행복한 왕자라고 불렀고, 왕자 자신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뒤 동상이 되어 도시의 높은 곳에 세워지면서 처음으로 담 너머를 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삶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아픈 아이가 있고, 추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이는 왜 학교에서 새장 속 새가 되었을까

윌리엄 블레이크, 우리는 언제부터 배우는 즐거움을 잊었을까 ― 「The School Boy」을 읽으며 여름 아침에 일찍 눈을 뜬 아이가 있습니다. 창밖에서는 새들이 울고, 멀리서는 사냥꾼의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종달새도 노래하고 있지요. 아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제 학교에 가야 합니다. 그 순간 아침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The School Boy」는 아주 단순한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의 이야기라고 하면 그뿐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시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아이는 배우는 것이 싫었던 걸까요. 아니면 배우는 일이 어느 순간 즐거움이 아니게 된 걸까요. The School Boy William Blake (1757–1827) 🔊 Read Poetry I love to rise in a summer morn, When the birds sing on every tree; The distant huntsman winds his horn, And the skylark sings with me: O what sweet company! But to go to school in a summer morn,— O it drives all joy away! Under a cruel eye outworn, The little ones spend the day In sighing and dismay. Ah then at times I drooping sit, And spend many an anxious hour; Nor in my book can I take delight, Nor sit in learning's bower, Worn through with the dreary shower. How can the bird that is born for joy Sit in a cage and sing? How can a child, when ...

버지니아 울프, 벽의 작은 얼룩 하나를 바라보다

  버지니아 울프, 벽의 작은 자국에서 시작된 생각 ― 「The Mark on the Wall」을 읽으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벽의 작은 얼룩 하나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그저 얼룩입니다. 못을 박았던 자리일 수도 있고, 벽에 묻은 작은 자국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시작됩니다. 저건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누가 만들었을까. 그러다 어느 순간 벽의 얼룩은 잊어버리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The Mark on the Wall」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벽에 있는 작은 자국 하나.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러 일어나면 금방 끝날 일인데, 화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 생각하지요. 그리고 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벽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아주 먼 곳까지 가 있습니다. 벽에 있는 작은 자국 어느 겨울날입니다. 화자는 담배를 피우며 벽을 바라보다 작은 자국 하나를 발견합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못을 박았던 흔적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그 위치에 왜 못을 박았을까. 예전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은 벽에 무엇을 걸어놓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전에 살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이 집을 떠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상상해봅니다. 처음에는 벽의 작은 자국이었는데, 생각은 벌써 그곳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The Mark on the Wall Virginia Woolf (1882–1941) 작품의 첫 부분에서 울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Perhaps it was the middle of January in the present year that I first looked up and saw the mark on the wall.” 우리말로 읽기 “아마 올해 1월 중순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 고개를 들어 벽에 있는 그 자국을 본 것은.” 날짜조차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라고 시작하지요. 이야기의 시작부터 기억은 조...

Fragments of Literature를 시작하며 —오래전에 읽었던 문학을 다시 펼칩니다

  — Fragments of Literature를 시작하며 책장 어딘가에 오래 꽂혀 있던 책을 다시 펼칠 때가 있습니다. 제목은 분명 낯설지 않은데 내용은 희미합니다. 한때 좋아했던 시인의 이름도 금세 떠오르지 않습니다. 분명 읽었던 책인데, 마치 처음 만나는 책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참 묘합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문학을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나면, 오래된 기억 하나가 뜻밖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 한 구절이 돌아오기도 하고, 오래전에 좋아했던 시인의 이름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작품보다 그 작품을 읽었던 시절의 나 자신 이 먼저 돌아오기도 합니다. Fragments of Literature 는 바로 그런 순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만난 수선화 오랜만에 윌리엄 워즈워스의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를 다시 펼쳤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익숙했던 시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으니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수선화가 보였습니다. 호숫가에 끝없이 피어 바람에 흔들리던 황금빛 수선화. 그런데 조금 더 읽다 보니 꽃보다 기억 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수선화가 어느 고요한 순간 마음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고,  시인의 마음이 그 꽃들과 함께 춤을 춥니다. And then my heart with pleasure fills,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시에서 또 다른 길이 열리고 수선화를 따라가다 보니 워즈워스 혼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호숫가를 함께 걸었던 여동생 도로시 워즈워스가 있었습니다. 도로시의 일기를 읽다 보니 같은 수선화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