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글

라벨이 English Literature인 게시물 표시

Robert Louis Stevenson — 아무 일정 없이, 어디론가 걷고 싶은 날, 「방랑자」

  집을 나서면서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늘 걷던 길을 따라가다가 평소에는 지나쳤던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다음 모퉁이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할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에는 머릿속을 따라오던 일들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지요.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잠깐은 발밑의 길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머뭅니다. 여러분도 무언가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동안 걸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진 적 있으신가요. 오늘 읽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방랑자」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산책을 나서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는 목소리입니다. 별이 보이는 덤불을 잠자리로 삼고, 강물에 적신 빵을 먹으며, 머리 위의 하늘과 앞에 놓인 길을 원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왜 이 사람이 그토록 길을 원하는지 잠시 함께 걸으며 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길을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내가 바라는 것은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발밑의 길뿐. 두 행을 읽으면 풍경이 단순해집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생각하던 마음으로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꾸 줄여 갑니다. 끝에 남는 것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리와 그 위로 펼쳐진 하늘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꼭 새로운 장소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그 말에 함께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원문 만나기 The Vagabond (To an air of Schubert)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Give to m...

Emily Brontë의 「사랑과 우정」— 설렘이 지나간 뒤에도 곁에 남는 사람

 오랜만에 연락했는데도 어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까닭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잘 지냈어?”라는 말 뒤로 조금씩 일상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으신가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문득 생각나면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사람 말입니다. 처음 가까워지던 순간은 선명하게 기억하면서도, 오래 곁에 있어 준 시간은 무심히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반가운 연락에 마음이 들뜨던 날과 달리, 늘 비슷하게 건네오는 안부는 익숙해지기 때문일까요. 그러다 조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서야 그 평범한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읽을 에밀리 브론테의 「사랑과 우정」에는 두 식물이 나옵니다. 꽃을 피우는 들장미와 짙은 잎을 지닌 호랑가시나무입니다. 시는 두 식물을 나란히 바라보다가 계절을 천천히 바꾸어 놓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때를 지나 겨울이 왔을 때, 우리의 눈길은 어디에 머물게 될까요. 꽃이 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 Love is like the wild rose-brier; Friendship like the holly-tree. 사랑은 들장미 같고, 우정은 호랑가시나무 같다. 첫 두 행은 간결합니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넓은 말을 두 식물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들장미를 떠올리면 꽃의 빛깔과 향기가 먼저 생각납니다. 호랑가시나무에서는 단단하고 윤기 나는 잎이 떠오릅니다. 시에서도 들장미가 피어 있을 때 호랑가시나무는 어둡게 보입니다. 꽃에 눈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 짙은 잎빛이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곁의 관계에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요.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의 말은 오래 되새기면서, 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안부는 짧게 받아넘기는 날이 있습니다. 브론테는 여기서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먼저 한 가지를 묻습니다. 어느 쪽이 더 한결같이 피어 있을까 하고요. 지...

Thomas Hardy — 「그 후에」(Afterwards), 작은 것들을 눈여겨보던 사람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이 자주 하던 말보다 사소한 몸짓 하나가 먼저 생각나기도 합니다. 길가에 핀 꽃을 보려고 걸음을 늦추던 모습, 멀리서 새소리가 들리면 잠깐 이야기를 멈추던 모습 같은 것들입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런 장면이 오래 남습니다. 오늘은 토머스 하디의 「그 후에」를 읽어보려 합니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일이 지나간 뒤의 이야기인지 궁금해집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입니다. 조금 쓸쓸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시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 잎이 흔들리고, 새가 내려앉고, 작은 고슴도치가 잔디밭을 건너갑니다. 떠나고 난 뒤를 생각하는 동안,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걸까요. “He was a man who used to notice such things” “그는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던 사람이었지.” 여기서 ‘이런 것들’은 오월의 나뭇잎입니다. 막 자아낸 비단처럼 얇고 섬세한 잎이 바람에 날개처럼 움직이는 모습이지요. 누구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누구나 그 앞에서 걸음을 늦추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디는 이웃들이 그런 잎을 보다가 자신을 잠깐 떠올려주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테스』의 소설가로 익숙한 하디는 시도 오래 썼습니다. 「그 후에」는 1917년에 나온 시집 『환영의 순간들』(Moments of Vision)의 마지막에 실렸습니다. 자신의 부재를 생각하는 시의 끝자리에 어떤 말이 남는지, 서두르지 않고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원문 — Afterwards Thomas Hardy (1840–1928) 🔊 Read Poetry When the Present has latched its postern behind my tremulous stay, And the May month flaps its glad green leaves like wings, Delicate-filmed as new-spun silk, will the...

John Keats, 여름의 노래가 겨울에도 이어질 때 — 「메뚜기와 귀뚜라미에게」

계절이 바뀔 때면 들리는 소리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한동안 익숙했던 소리가 잦아들고, 그 자리에 다른 작은 소리가 들어옵니다. 여름이 지나가는 일은 아쉬워도, 저녁 풀숲에서 들려오는 울음에는 또 그 나름의 정겨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메뚜기와 귀뚜라미가 등장하는 키츠의 짧은 시를 읽어보려 합니다. 여름 한낮에서 겨울 저녁으로 건너가는 동안, 시인은 두 작은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새들마저 더위에 지쳐 쉬는 시간에도, 서리가 내려 사방이 고요해진 시간에도 어디선가 노래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의 첫 문장은 “대지의 시는 결코 죽지 않는다”입니다. 조금 큰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려주는 목소리는 아주 작습니다. 풀밭의 메뚜기 한 마리, 난롯가의 귀뚜라미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메뚜기와 귀뚜라미에게 On the Grasshopper and Cricket John Keats (1795–1821) 🔊 Read Poetry The poetry of earth is never dead: When all the birds are faint with the hot sun, And hide in cooling trees, a voice will run From hedge to hedge about the new-mown mead; That is the Grasshopper's—he takes the lead In summer luxury,—he has never done With his delights; for when tired out with fun He rests at ease beneath some pleasant weed. The poetry of earth is ceasing never: On a lone winter evening, when the frost Has wrought a silence, from the stove there shrills The Cricket's song, in warmth increasi...

Katherine Mansfield — 「미스 브릴」(Miss Brill) · 단편소설

 일요일 오후, 특별히 만날 사람이 없어도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습니다. 누구와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오후가 조금 달라집니다. 늘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는 얼굴들도 있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보이지 않으면 오늘은 안 나왔나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도 내가 그런 얼굴일까요. 우리가 서로 알아보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오늘 읽을 「미스 브릴」에도 일요일마다 공원에 나오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말소리, 악단의 연주를 놓치지 않고 살핍니다. 그 작은 구경이 한 주의 생활에서 꽤 중요한 일입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이 오후를 따라가면서 외롭다는 말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대하는지 가까이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아주 짧은 말 한마디가 그 오후를 바꾸어놓습니다. 일요일을 위해 꺼낸 모피 미스 브릴은 아끼는 모피 목도리를 꺼내 손질하고 외출합니다. 상자 안에 있던 모피의 먼지를 털고 털을 빗으며, 작은 동물의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아오는 듯 느낍니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그에게는 아직 다정하게 말을 걸고 싶은 존재입니다. 이 준비를 읽고 나면 공원 나들이가 단순한 시간 보내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걸칠지 생각했고, 익숙한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을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누가 초대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약속이 있는 일요일입니다. 공원에서는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일이 즐겁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데 정작 말을 나눌 사람들은 조용하고, 그의 눈길은 다른 벤치와 산책길로 옮겨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다른 노인들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어딘가 이상하고 말이 없으며, 어두운 작은 방이나 벽장 같은 곳에서 막 나온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자신도 비슷한 자리에 앉아 있지만, 아직 그들 사이에서 자기 모습을 보...

Walter de la Mare, 달빛 아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문 ― 「The Listeners」를 읽으며

 밤늦은 길을 걷다가 불빛도 없는 오래된 집 앞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문을 두드려봅니다.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이 정말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Walter de la Mare의 「The Listeners」는 바로 그런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시를 읽는 동안 특별히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문이 열리지도 않고, 유령이 나타나지도 않지요. 그런데 시가 끝난 뒤에도 그 집과 달빛과 문 앞에 서 있던 여행자의 모습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마 이 시의 묘한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The Listeners Walter de la Mare (1873–1956) ‘Is there anybody there?’ said the Traveller, Knocking on the moonlit door; 우리말로 읽기 “거기 누구 있습니까?” 여행자가 말했습니다. 달빛이 비치는 문을 두드리면서요. 여행자는 말을 타고 깊은 숲속의 집 앞에 도착합니다. 말은 고요한 숲 바닥의 풀을 뜯고 있고, 오래된 탑에서는 새 한 마리가 갑자기 날아오릅니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창가에도 사람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곳에 ‘phantom listeners’ ,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묘한 청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두운 계단과 텅 빈 홀 어딘가에 서서 여행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대답하지 않은 채로요. “거기 누구 있습니까?” 이 시의 첫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Is there anybody there?” 누군가의 집을 찾아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면서 평범한 질문이 갑자기 이상해집니다. ...

John Keats, 아직 쓰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은데 ― 「When I Have Fears」를 읽으며

  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읽고 싶은 책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젊을 때는 시간이 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온 시간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John Keats가 「When I Have Fears」를 썼을 때는 스물두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시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모두 쓰기 전에 삶이 끝나버리면 어떻게 할까. 이 짧은 소네트는 바로 그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Keats는 이 작품을 1818년 초에 썼으며, 실제로 그는 불과 몇 해 뒤인 1821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만 이 시를 훗날의 죽음을 예견한 작품처럼 읽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시 속에서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 아직 펼쳐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이니까요. When I Have Fears John Keats (1795–1821) 🔊 Read Poetry When I have fears that I may cease to be Before my pen has gleaned my teeming brain, Before high-pilèd books, in charactery, Hold like rich garners the full ripened grain; When I behold, upon the night’s starred face, Huge cloudy symbols of a high romance, And think that I may never live to trace Their shadows with the magic hand of chance; And when I feel, fair creature of an hour, That...

George Eliot, 혼자 살던 남자의 집에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 「Silas Marner」를 읽으며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혼자인 것이 익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믿지 않아도 되고, 기대하지 않아도 되고, 실망할 일도 없는 생활이지요. 처음에는 외로웠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고요함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George Eliot의 『Silas Marner』에 나오는 Silas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에게도 처음부터 사람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사람을 믿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의심받은 뒤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Silas는 마을을 떠나 Raveloe라는 곳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베를 짜며 혼자 살아갑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하루하루 베틀 앞에 앉아 일을 하지요. 그리고 그가 세상 대신 붙잡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금화입니다. 처음에는 노동의 대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면 Silas는 모아둔 금화를 꺼내어 바라보고, 만지고, 세어봅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금화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적어도 그에게 금화는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금화만 남은 방 그런데 어느 날 그 금화마저 사라집니다. 누군가 그의 집에 들어와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훔쳐간 것입니다. Silas에게는 단순히 돈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람을 잃었고, 공동체를 잃었고, 믿음을 잃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것까지 없어져 버린 셈이지요. 텅 빈 자리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 대신 돈을 붙잡았는데, 그 돈마저 사라진 뒤에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뜻밖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Silas의 집 문은 열려 있었고, 눈길을 헤매던 아주 어린아이가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Edward Thomas, 기차가 잠시 멈춘 작은 역의 오후

  ― 「Adlestrop」를 읽으며 우리는 여행 중에 수많은 장소를 지나갑니다. 그중에는 오래 기억에 남는 곳도 있지만,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곳도 있지요.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셨을까요.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한적한 풍경 하나, 정차한 순간의 공기, 혹은 멀리서 들려오던 새소리 하나가 오랫동안 남는 경우 말입니다. Edward Thomas의 「Adlestrop」는 바로 그런 순간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대단한 사건이 없습니다. 기차가 한 작은 역에 잠깐 멈춥니다. 사람이 내리지도 않고, 타지도 않습니다. 말을 건네는 이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정차의 순간은, 한 편의 시가 되어 오랫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오늘은 그 조용한 시 한 편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먼저 시의 첫 부분을 잠시 보겠습니다 Adlestrop Edward Thomas (1878–1917) Yes. I remember Adlestrop— The name, because one afternoon Of heat the express-train drew up there Unwontedly. It was late June. 우리말로 옮기면 그래요. 저는 애들스트롭을 기억합니다— 그 이름을요. 어느 무더운 오후, 급행열차가 그곳에 뜻밖에도 멈추어 섰기 때문입니다. 때는 늦은 6월이었습니다. 시인은 아주 담담하게 시작합니다. “그래요. 나는 애들스트롭을 기억합니다.” 이 첫 문장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무언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꼭 그곳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닌가 봅니다. 때로는 그저 그곳의 이름 , 그리고 그때의 공기 만으로도 충분하지요. Adlestrop Edward Thomas (1878–1917) 🔊 Read Poetry Yes. ...

Charles Lamb, 어느 저녁 아이들에게 들려준 오래된 이야기

  ― 「Dream-Children: A Reverie」를 읽으며 저녁이 조용해지면 오래전 일이 이상하리만큼 가까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미 사라진 집이나 오래전에 떠난 사람, 그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마음 같은 것들이 그렇지요. 낮에는 잊고 지냈던 기억도 밤이 되면 조용히 자리를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Charles Lamb의 「Dream-Children: A Reverie」도 그런 시간 속에서 시작합니다. 한 남자가 두 아이를 앞에 두고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들의 이름은 John과 Alice입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와 어린 시절의 집, 먼저 세상을 떠난 형, 그리고 오래 마음에 품었던 한 여인에 대해 말합니다. 처음에는 따뜻한 가족의 저녁처럼 보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고 있고, 아버지는 오래전 기억을 하나씩 꺼내놓습니다. 그런데 글이 끝나갈 무렵, 우리가 보고 있던 장면 전체가 아주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아이들은 누구였을까요? Dream-Children: A Reverie Charles Lamb (1775–1834) 램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씁니다. We are not of Alice, nor of thee, nor are we children at all. The children of Alice call Bartrum father. We are nothing; less than nothing, and dreams. We are only what might have been... 우리말로 읽어봅니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들도 아니고, 당신의 아이들도 아니며, 사실 아이들조차 아닙니다.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트럼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없는 존재, 그저 꿈이지요. 우리는 다만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존재일 뿐 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화자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자신이 앉아 있던 독신자의 안락의자는 그대로이고, 곁에는 누...

Elizabeth Barrett Browning, 사랑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요

  ― 「How Do I Love Thee?」를 읽으며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이유를 떠올립니다. 그 사람이 다정해서, 오래 함께해서, 나를 이해해주어서. 그런데 사랑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이유를 하나씩 설명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지요.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의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내 삶 전체에 그 마음이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lizabeth Barrett Browning의 「How Do I Love Thee?」는 바로 그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How do I love thee?” 나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을까요? 시인은 질문을 던진 뒤 하나씩 세어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을 세는 일이 숫자를 헤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How Do I Love Thee? (Sonnet 43) 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1) 🔊 Read Poetry How do I love thee? Let me count the ways. I love thee to the depth and breadth and height My soul can reach, when feeling out of sight For the ends of Being and ideal Grace. I love thee to the level of every day's Most quiet need, by sun and candle-light. I love thee freely, as men strive for Right; I love thee purely, as they turn from Praise. I love thee with the passion put to use In my old griefs, and with my childhood's faith. I love thee with a love I seemed to los...

Robert Browning, 밤바다를 건너 한 사람에게 가는 길

  ― 「Meeting at Night」를 읽으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밤길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도착할 곳이 분명한데도 가는 길은 이상하게 길게 느껴집니다.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마음은 벌써 그 사람 곁에 가 있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도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이지요. Robert Browning의 「Meeting at Night」에는 그런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밤바다를 건넙니다. 배가 해안에 닿은 뒤에는 모래사장을 걷고, 다시 들판을 세 개나 건넙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시는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 걸음씩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됩니다. 그 긴 길 끝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Meeting at Night Robert Browning (1812–1889) 🔊 Read Poetry The gray sea and the long black land; And the yellow half-moon large and low; And the startled little waves that leap In fiery ringlets from their sleep, As I gain the cove with pushing prow, And quench its speed i' the slushy sand. Then a mile of warm sea-scented beach; Three fields to cross till a farm appears; A tap at the pane, the quick sharp scratch And blue spurt of a lighted match, And a voice less loud, thro' its joys and fears, Than the two hearts beating each to each! 우리말로 읽어봅니다 회색 바다와 길게 누운 검은 육지, 그리고 크고 낮게 걸린 노란 반달. 잠에서 놀라 깨어난 듯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