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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8월, 2026의 게시물 표시

Robert Louis Stevenson — 아무 일정 없이, 어디론가 걷고 싶은 날, 「방랑자」

  집을 나서면서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늘 걷던 길을 따라가다가 평소에는 지나쳤던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다음 모퉁이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할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에는 머릿속을 따라오던 일들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지요.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잠깐은 발밑의 길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머뭅니다. 여러분도 무언가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동안 걸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진 적 있으신가요. 오늘 읽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방랑자」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산책을 나서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는 목소리입니다. 별이 보이는 덤불을 잠자리로 삼고, 강물에 적신 빵을 먹으며, 머리 위의 하늘과 앞에 놓인 길을 원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왜 이 사람이 그토록 길을 원하는지 잠시 함께 걸으며 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길을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내가 바라는 것은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발밑의 길뿐. 두 행을 읽으면 풍경이 단순해집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생각하던 마음으로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꾸 줄여 갑니다. 끝에 남는 것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리와 그 위로 펼쳐진 하늘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꼭 새로운 장소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그 말에 함께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원문 만나기 The Vagabond (To an air of Schubert)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Give to m...

Thomas Hardy, 모든 것이 겨울인데 새는 왜 노래했을까 ― 「The Darkling Thrush」를 읽으며

  한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겨울 저녁입니다. 들판에는 생기가 사라졌고,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앙상하게 뻗어 있습니다. 사람들도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그 풍경 속에 한 사람이 홀로 서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세상 전체가 늙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주변 풍경 어디에도 노래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토머스 하디의 「The Darkling Thrush」는 바로 그 이상한 노랫소리에서 시작되는 시입니다. The Darkling Thrush Thomas Hardy (1840–1928) 🔊 Read Poetry I leant upon a coppice gate When Frost was spectre-gray, And Winter’s dregs made desolate The weakening eye of day. The tangled bine-stems scored the sky Like strings of broken lyres, And all mankind that haunted nigh Had sought their household fires. The land’s sharp features seemed to be The Century’s corpse outleant, His crypt the cloudy canopy, The wind his death-lament. The ancient pulse of germ and birth Was shrunken hard and dry, And every spirit upon earth Seemed fervourless as I. At once a voice arose among The bleak twigs overhead In a full-hearted evensong Of joy illimited; An aged thrush, frail, gaunt, and sma...

Lord Byron, 밤하늘의 빛과 어둠을 닮은 사람

― 「She Walks in Beauty」를 읽으며 어떤 사람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요? 눈이나 얼굴, 미소 같은 것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바이런은 조금 뜻밖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환한 낮이 아니라 밤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별들이 떠 있고, 어둠과 빛이 서로 밀어내지 않은 채 한곳에 머뭅니다. 그리고 바이런은 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바로 그 밤하늘에 비유합니다.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그녀는 밤처럼 아름다움 속을 걷습니다. 이 첫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이 시가 단순히 아름다운 얼굴을 찬양하는 시만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바이런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빛과 어둠이 어울리는 데서 시작해, 어느새 한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어가니까요. She Walks in Beauty Lord Byron (1788–1824) 🔊 Read Poetry 1814년에 쓰였고 이듬해 시집 『Hebrew Melodies』에 실린 작품입니다. 현재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Of cloudless climes and starry skies; And all that’s best of dark and bright Meet in her aspect and her eyes; Thus mellowed to that tender light Which heaven to gaudy day denies. One shade the more, one ray the less, Had half impaired the nameless grace Which waves in every raven tress, Or softly lightens o’er her face; Where thoughts serenely sweet express, How pure, how dear their dw...

W. B. 예이츠, 늙어가는 얼굴까지 사랑한다는 것 ― 「When You Are Old」를 다시 읽으며

  젊은 날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는 많습니다. 눈부신 얼굴, 처음 만났던 순간,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을 노래하는 시도 많지요. 그런데 예이츠는 조금 다른 곳에서 사랑을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이미 늙어버린 먼 훗날입니다. 머리는 희어지고, 졸음이 찾아오고, 불가에 앉아 오래된 책 한 권을 천천히 펼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지난날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젊고 아름다웠던 얼굴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 사람은 시간이 흘러 변해가는 얼굴까지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변해가는 시간까지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When You Are Old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 Read Poetry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이 시는 현재 퍼블...

이상, 거울 속의 나는 왜 나와 악수할 수 없을까 ― 「거울」을 다시 읽으며

거울 앞에 서면 내가 보입니다. 얼굴도 같고, 옷도 같고, 내가 움직이면 그 사람도 움직이지요. 그런데 손을 들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나는 오른손을 들었는데 거울 속의 사람은 왼손을 듭니다. 내가 웃으면 그도 웃지만,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분명 나인데 나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상은 바로 이 익숙하면서도 이상한 순간을 시로 가져옵니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는 거울 앞에서 그는 묻는 듯합니다. 거울 속에 있는 저 사람은 정말 나일까요?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거울」 이상 (1910–1937) 이 시는 1933년 『가톨릭청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서도 「거울」 전문과 함께 발표지를 『가톨릭청년』 1933년 10월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 Read Poetry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 이상의 「거울」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마주 세우며 자의식과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두 자아가 끝내 합쳐질 수 없는 모습을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첫 구절은 너무 당연한 말로 시작합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그렇지요. 거울은 모습을 비출 뿐 소리를 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Percy Bysshe Shelley, 하늘에서 들려오는 기쁨의 노래

  ― 「To a Skylark」을 함께 읽으며 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눈에서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런데 노랫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요. Percy Bysshe Shelley는 바로 그 순간 종달새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시의 첫마디부터 조금 이상합니다. “Bird thou never wert.” 너는 새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분명 새를 바라보고 있는데 새가 아니라니, 무슨 뜻일까요? 얼마 전 William Wordsworth의 종달새를 함께 읽었지요. 그 새도 아주 높이 날았습니다. 하지만 Wordsworth는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저 아래 땅 위의 작은 둥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Shelley의 시선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종달새를 따라 계속 위로 올라갑니다. 그러다 새의 모습마저 사라지고 노래만 남게 되지요. 그 노래를 듣던 Shelley는 어느 순간 새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순수한 기쁨 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우리도 그 노래를 조금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To a Skylark 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 Read Poetry Hail to thee, blithe Spirit! Bird thou never wert, That from Heaven, or near it, Pourest thy full heart In profuse strains of unpremeditated art. Higher still and higher From the earth thou springest Like a cloud of fire; The blue deep thou wingest, And singing still dost soar, and soaring ever singest. In the golden lightning Of the sunken sun, O'er which clouds are brigh...

Percy Bysshe Shelley, 사막에 남겨진 왕의 얼굴

  ― 「Ozymandias」를 함께 읽으며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석상을 세우고, 그 아래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새겼습니다. 아마 그 기념물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신을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왕도 사라졌습니다. 그가 다스리던 사람들도 사라졌습니다. 도시도, 궁전도, 제국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행자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부서진 돌다리 두 개. 모래 속에 반쯤 묻힌 얼굴 하나. 그리고 돌 위에 아직 남아 있는 몇 마디의 글. Percy Bysshe Shelley의 「Ozymandias」는 겨우 14행 입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 안에서 우리는 한 제국의 탄생과 몰락보다 더 긴 시간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그 여행자와 함께 사막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Ozymandias 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 READ POETRY I met a traveller from an antique land, Who said—“Two vast and trunkless legs of stone Stand in the desert. . . . Near them, on the sand, Half sunk a shattered visage lies, whose frown, And wrinkled lip, and sneer of cold command, Tell that its sculptor well those passions read Which yet survive, stamped on these lifeless things, The hand that mocked them, and the heart that fed; And on the pedestal, these words appear: My name ...

Samuel Taylor Coleridge, 꿈의 궁전과 상상력의 심연

  ― 「Kubla Khan」을 함께 읽으며 어떤 시는 처음부터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멀어집니다. Samuel Taylor Coleridge의 「Kubla Khan」이 그런 작품입니다. 처음 읽으면 낯선 이름과 풍경이 계속 나타납니다. Xanadu라는 땅, 거대한 궁전, 신성한 강,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동굴, 갑자기 솟구치는 분수, 지하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예언,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비시니아의 소녀까지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 질문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 시를 문제처럼 풀기보다 꿈처럼 경험해보겠습니다. Coleridge가 보여주는 장면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아름다운 풍경 아래에 숨어 있던 불안과 공포가 보이고, 마지막에는 이 시가 단순히 Xanadu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의 상상력에 관한 시 였다는 사실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그럼 이제 Xanadu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Kubla Khan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 🔊 Read Poetry In Xanadu did Kubla Khan A stately pleasure-dome decree: Where Alph, the sacred river, ran Through caverns measureless to man Down to a sunless sea. So twice five miles of fertile ground With walls and towers were girdled round; And there were gardens bright with sinuous rills, Where blossomed many an incense-bearing tree; And here were forests ancient as the hills, Enfolding sunny spots of greenery. But oh! 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