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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6의 게시물 표시

Robert Louis Stevenson — 아무 일정 없이, 어디론가 걷고 싶은 날, 「방랑자」

  집을 나서면서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늘 걷던 길을 따라가다가 평소에는 지나쳤던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다음 모퉁이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할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에는 머릿속을 따라오던 일들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지요.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잠깐은 발밑의 길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머뭅니다. 여러분도 무언가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동안 걸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진 적 있으신가요. 오늘 읽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방랑자」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산책을 나서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는 목소리입니다. 별이 보이는 덤불을 잠자리로 삼고, 강물에 적신 빵을 먹으며, 머리 위의 하늘과 앞에 놓인 길을 원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왜 이 사람이 그토록 길을 원하는지 잠시 함께 걸으며 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길을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내가 바라는 것은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발밑의 길뿐. 두 행을 읽으면 풍경이 단순해집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생각하던 마음으로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꾸 줄여 갑니다. 끝에 남는 것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리와 그 위로 펼쳐진 하늘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꼭 새로운 장소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그 말에 함께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원문 만나기 The Vagabond (To an air of Schubert)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Give to m...

Thomas Hardy — 「그 후에」(Afterwards), 작은 것들을 눈여겨보던 사람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이 자주 하던 말보다 사소한 몸짓 하나가 먼저 생각나기도 합니다. 길가에 핀 꽃을 보려고 걸음을 늦추던 모습, 멀리서 새소리가 들리면 잠깐 이야기를 멈추던 모습 같은 것들입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런 장면이 오래 남습니다. 오늘은 토머스 하디의 「그 후에」를 읽어보려 합니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일이 지나간 뒤의 이야기인지 궁금해집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입니다. 조금 쓸쓸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시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 잎이 흔들리고, 새가 내려앉고, 작은 고슴도치가 잔디밭을 건너갑니다. 떠나고 난 뒤를 생각하는 동안,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걸까요. “He was a man who used to notice such things” “그는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던 사람이었지.” 여기서 ‘이런 것들’은 오월의 나뭇잎입니다. 막 자아낸 비단처럼 얇고 섬세한 잎이 바람에 날개처럼 움직이는 모습이지요. 누구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누구나 그 앞에서 걸음을 늦추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디는 이웃들이 그런 잎을 보다가 자신을 잠깐 떠올려주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테스』의 소설가로 익숙한 하디는 시도 오래 썼습니다. 「그 후에」는 1917년에 나온 시집 『환영의 순간들』(Moments of Vision)의 마지막에 실렸습니다. 자신의 부재를 생각하는 시의 끝자리에 어떤 말이 남는지, 서두르지 않고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원문 — Afterwards Thomas Hardy (1840–1928) 🔊 Read Poetry When the Present has latched its postern behind my tremulous stay, And the May month flaps its glad green leaves like wings, Delicate-filmed as new-spun silk, will the...

John Keats, 여름의 노래가 겨울에도 이어질 때 — 「메뚜기와 귀뚜라미에게」

계절이 바뀔 때면 들리는 소리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한동안 익숙했던 소리가 잦아들고, 그 자리에 다른 작은 소리가 들어옵니다. 여름이 지나가는 일은 아쉬워도, 저녁 풀숲에서 들려오는 울음에는 또 그 나름의 정겨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메뚜기와 귀뚜라미가 등장하는 키츠의 짧은 시를 읽어보려 합니다. 여름 한낮에서 겨울 저녁으로 건너가는 동안, 시인은 두 작은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새들마저 더위에 지쳐 쉬는 시간에도, 서리가 내려 사방이 고요해진 시간에도 어디선가 노래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의 첫 문장은 “대지의 시는 결코 죽지 않는다”입니다. 조금 큰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려주는 목소리는 아주 작습니다. 풀밭의 메뚜기 한 마리, 난롯가의 귀뚜라미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메뚜기와 귀뚜라미에게 On the Grasshopper and Cricket John Keats (1795–1821) 🔊 Read Poetry The poetry of earth is never dead: When all the birds are faint with the hot sun, And hide in cooling trees, a voice will run From hedge to hedge about the new-mown mead; That is the Grasshopper's—he takes the lead In summer luxury,—he has never done With his delights; for when tired out with fun He rests at ease beneath some pleasant weed. The poetry of earth is ceasing never: On a lone winter evening, when the frost Has wrought a silence, from the stove there shrills The Cricket's song, in warmth increasi...

Washington Irving,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 「Rip Van Winkle」를 읽으며

 학부 시절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어릴적 살던 고향을 가끔 찾아가곤 하는데, 갈 때마다 변해가는 마을을 둘러보면 참 세월이 무심함을 느끼게 됩니다. 같이 뛰놀던 친구들, 오가며 인사 나누던 동네 사람들 다 어디가고 살던 집도 모두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 그런 허전한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의 세세한 문장들은 많이 잊었는데도, 한 남자가 산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아주 오랜 뒤에 깨어난다는 이야기는 이상하게 남아 있지요. 그때는 아마 기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조금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잠에서 깨어났더니 자기가 알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익숙했던 마을은 달라져 있고, 자신만 옛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서 있는 장면 말입니다. 스무 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요. 산으로 올라간 Rip Washington Irving의 「Rip Van Winkle」은 1819년에 처음 발표된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뉴욕의 허드슨 강과 Catskill Mountains 주변입니다. Irving은 이 산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는 신비로운 공간처럼 그려냅니다. Rip Van Winkle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꽤 친절한 사람입니다. 남의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잘 도와주고, 아이들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집의 일에는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다니고, 시간이 나면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총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지요. 어느 날도 그는 개 Wolf와 함께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다 깊은 산속에서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을 따라간 곳에는 기묘한 사람들이 말없이 볼링과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Rip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술을 조금씩 마십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결국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Oscar Wilde, 담장을 허물자 정원에 봄이 왔습니다— 「이기적인 거인(The Selfish Giant)」을 읽으며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입니다. 큰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라도 옆을 돌아볼 틈이 있을까요? 그 속도에 맞추어 살다 보면 마음이 지치는 날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어서,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면 다른 사람을 헤아릴 여유까지 잃곤 합니다. 내 몫을 지키고 내 마음부터 돌보고 싶어지는 것도 어쩌면 그런 때인지 모릅니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좋고, 익숙한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으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다가도 오래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에 들어서면, 깨끗이 정돈된 풍경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문득 누군가의 말소리나 웃음소리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어릴 적 읽었던 동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정원에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은 담장을 세운 거인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정원은 온전히 제 것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기적인 거인」을 다시 펼쳐봅니다. 어린 시절에는 거인이 왜 그토록 욕심을 부렸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면, 지금은 그가 세운 담장 안쪽의 고요함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됩니다. 집이나 정원의 분위기는 그곳에 놓인 것들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말소리가 오가던 시간도 함께 남아 있으니까요. 오늘은 자기 정원에서 아이들을 내쫓은 거인의 이야기를 읽어보려 합니다. 가을에 만나는 동화이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겨울이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다른 곳에는 꽃이 피는데 유독 한 정원에만 봄이 오지 않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기적인 거인」입니다. 제목에서 이미 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만, 읽다 보면 잘못을 나무라는 말보다 그가 달라지는 작은 순간에 마음이 머뭅니다. 커다란 손으로 아주 작은 아이를 들어 올리는 장면입니다. 아이들이 떠난 정원 거인이 오랫동안 집을 비운 사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Katherine Mansfield — 「미스 브릴」(Miss Brill) · 단편소설

 일요일 오후, 특별히 만날 사람이 없어도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습니다. 누구와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오후가 조금 달라집니다. 늘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는 얼굴들도 있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보이지 않으면 오늘은 안 나왔나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도 내가 그런 얼굴일까요. 우리가 서로 알아보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오늘 읽을 「미스 브릴」에도 일요일마다 공원에 나오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말소리, 악단의 연주를 놓치지 않고 살핍니다. 그 작은 구경이 한 주의 생활에서 꽤 중요한 일입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이 오후를 따라가면서 외롭다는 말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대하는지 가까이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아주 짧은 말 한마디가 그 오후를 바꾸어놓습니다. 일요일을 위해 꺼낸 모피 미스 브릴은 아끼는 모피 목도리를 꺼내 손질하고 외출합니다. 상자 안에 있던 모피의 먼지를 털고 털을 빗으며, 작은 동물의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아오는 듯 느낍니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그에게는 아직 다정하게 말을 걸고 싶은 존재입니다. 이 준비를 읽고 나면 공원 나들이가 단순한 시간 보내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걸칠지 생각했고, 익숙한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을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누가 초대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약속이 있는 일요일입니다. 공원에서는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일이 즐겁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데 정작 말을 나눌 사람들은 조용하고, 그의 눈길은 다른 벤치와 산책길로 옮겨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다른 노인들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어딘가 이상하고 말이 없으며, 어두운 작은 방이나 벽장 같은 곳에서 막 나온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자신도 비슷한 자리에 앉아 있지만, 아직 그들 사이에서 자기 모습을 보...

Robert Louis Stevenson, 여름꽃이 진 자리에서 가을을 만납니다 — 「가을의 불(Autumn Fires)」을 읽으며

 9월도 어느새 끝을 향해 갑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는 날에도 달력을 보면 가을이 꽤 가까이 와 있습니다. 계절은 한꺼번에 바뀌기보다, 익숙한 풍경의 한쪽을 조금씩 바꾸어놓는 것 같습니다. 가을을 이야기하면 낙엽이나 쓸쓸함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오늘 읽을 시의 가을은 조금 다릅니다. 여름꽃이 진 정원에 붉은 불이 피어나고, 회색 연기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꽃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눈이 어느새 움직이는 불꽃을 따라갑니다. 『보물섬』의 작가로 익숙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에게 이런 짧은 시도 있습니다. 어린이 시집 『A Child’s Garden of Verses』에 실린 「가을의 불」입니다. 멀리 항해를 떠나는 대신, 이번에는 정원 너머의 작은 풍경을 함께 바라봅니다. Flowers in the summer, Fires in the fall! 여름에는 꽃, 가을에는 불! 시의 마지막 두 줄입니다. 어쩌면 너무 간단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 내어 읽으면, 여름이 끝났다는 아쉬움 곁에 가을을 반기는 마음도 들어옵니다. 오늘은 그 짧은 두 줄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눈길을 천천히 따라가봅니다. Autumn Fires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In the other gardens And all up the vale, From the autumn bonfires See the smoke trail! Pleasant summer over And all the summer flowers, The red fire blazes, The grey smoke towers. Sing a song of seasons! Something bright in all! Flowers in the summer, Fires in the fall! ※ ‘vale’은 ‘골짜기’를 뜻하는 시어입니다. 우리말로 다시 읽기 — 가을의 불 다른 집 정원에서도 골짜기 위쪽 곳곳에서도, 가을 ...

Sara Teasdale,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무엇을 내어줄까요 — 「물물교환(Barter)」을 읽으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돌아보면, 해야 했던 일보다 뜻밖의 장면 하나가 먼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길을 걷다 맡은 나무 냄새나 잠깐 들려온 노래, 나를 보고 웃어주던 얼굴 같은 것들입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이 오래 남습니다. 오늘은 그 작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모아놓은 시를 읽어보려 합니다. 파도와 불꽃, 비에 젖은 소나무,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차례로 나옵니다. 하나씩 떠올리다 보면 잠시 잊고 지냈던 풍경도 따라올 듯합니다. 사라 티즈데일은 이 시에 「물물교환」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부드러운 풍경을 생각하다가 제목을 다시 보면 조금 낯설어집니다. 무엇을 받고, 무엇을 내어주는 거래일까요. Life has loveliness to sell, 삶은 아름다움을 내어놓고 팔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판다’는 말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시가 펼쳐 보이는 것들에는 가격표가 없습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희어지는 순간이나 빗속의 솔향기는 손에 담아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제목의 뜻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Barter Sara Teasdale (1884–1933) 🔊 Read Poetry Life has loveliness to sell, All beautiful and splendid things, Blue waves whitened on a cliff, Soaring fire that sways and sings, And children's faces looking up Holding wonder like a cup. Life has loveliness to sell, Music like a curve of gold, Scent of pine trees in the rain, Eyes that love you, arms that hold, And for your spirit's still delight, Holy thoughts that star...

Christina Rossetti, 이 길 끝에는 쉴 곳이 있을까요 — 「오르막길(Up-Hill)」을 읽으며

  산길을 오르다 보면 저 굽이만 돌면 조금 평평해지겠지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또 오르막입니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고, 먼저 내려오는 사람에게 묻게 됩니다. 아직 많이 남았나요. 오늘 읽을 시에도 그런 물음이 나옵니다. 길은 끝까지 오르막인지,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하는지. 대답을 들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지만, 막상 듣고 나면 또 다른 걱정이 떠오릅니다. 해가 지면 쉴 곳은 있을까요. 너무 늦게 도착해 문밖에 남게 되지는 않을까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오르막길」은 묻는 목소리와 답하는 목소리가 번갈아 이어지는 짧은 시입니다. 누가 묻고 누가 대답하는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대화에 우리 마음이 들어갈 자리도 남아 있습니다. Does the road wind up-hill all the way? Yes, to the very end. 이 길은 내내 굽이굽이 오르막인가요? 네, 맨 끝까지 그렇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쉬워진다고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음 대답의 끝에 짧은 부름이 붙습니다. ‘my friend’, 벗이여. 길에 관한 설명을 듣다가 문득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듯합니다. Up-Hill Christina Rossetti (1830–1894) 🔊 Read Poetry Does the road wind up-hill all the way? Yes, to the very end. Will the day's journey take the whole long day? From morn to night, my friend. But is there for the night a resting-place? A roof for when the slow dark hours begin. May not the darkness hide it from my face? You cannot miss that inn. Shall I meet other wayfarers at night? Those who have gone b...

Robert Frost, 눈가루가 내려앉은 뒤 하루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 「눈가루(Dust of Snow)」를 읽으며

 가을로 들어서자마자 겨울 이야기가 나오게 되네요. 오늘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잠시나마 위로를 얻는 순간을 담은 시를 읽어봅니다.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인의 세심한 눈길과 함께, 짧은 시가 남기는 긴 여운을 따라가 봅니다. 별일 없이도 마음이 무거운 날이 있습니다. 아침에 들은 말이 자꾸 떠오르거나, 하려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하루가 벌써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날입니다. 밖으로 나와 걸어도 생각은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그러다가 아주 사소한 일에 걸음을 멈추기도 합니다. 바람에 잎 하나가 날아와 옷에 붙거나,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봅니다. 방금까지 생각하던 일은 그대로인데, 잠깐 다른 곳을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가루」에는 까마귀 한 마리와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가지에서 떨어지는 눈이 나옵니다. 겨우 여덟 줄의 시입니다. 그 짧은 순간을 따라 읽다 보면, 하루를 돌아보는 마음에도 작은 틈이 생깁니다. Dust of Snow Robert Frost (1874–1963) 🔊 Read Poetry The way a crow Shook down on me The dust of snow From a hemlock tree Has given my heart A change of mood And saved some part Of a day I had rued. ※ hemlock tree는 솔송나무류의 침엽수를 가리킵니다.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독초와는 다릅니다. 우리말로 읽기 — 눈가루 까마귀 한 마리가 솔송나무에서 내 위로 눈가루를 털어 내린 일이 내 마음의 기분을 바꾸어 놓고, 후회하던 하루의 얼마쯤을 건져 주었다. 이 글을 위해 영어 원문에서 새로 옮겼습니다. 우리말의 흐름에 맞게 첫 연의 어순을 조정했습니다. 고개를 들게 한 작은 일 시 속의 사람은 왜 그날을 후회하고 있었을까요. 프로스트는 그 사연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누구와 다투었는...

에밀리 디킨슨, 책 한 권으로 떠나는 먼 여행

— 「책만 한 배는 없다」를 읽으며 [이미지 위치: 부제 아래에 생성한 범선 이미지를 넣습니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방 안이 잠시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먼 바다에 있었거나, 오래전 어느 마을의 골목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 있는데 마음은 아직 그곳에서 돌아오는 중입니다. 실제로 가본 적 없는 곳이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그곳의 날씨와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멀리 데려갔을까요. 에밀리 디킨슨은 그 움직임을 배 한 척에 빗댑니다.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To take us lands away, 우리를 먼 나라로 데려다줄 책만 한 배는 없다. 책을 펼친 자리가 작은 선착장이 됩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미리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첫 문장을 읽습니다.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Emily Dickinson (1830–1886) 🔊 Read Poetry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To take us lands away, Nor any coursers like a page Of prancing poetry. This traverse may the poorest take Without oppress of toll; How frugal is the chariot That bears a human soul! ※ coursers는 빠르게 달리는 말들을 뜻하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말로 다시 읽기 — 책만 한 배는 없다 우리를 먼 나라로 데려다줄 책만 한 배는 없다. 힘차게 뛰노는 시 한 페이지에 견줄 준마들도 없다. 가장 가난한 이도 이 길을 건널 수 있다, 통행료의 짐에 눌리지 않고. 사람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마차는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달리는가! 이 글을 위해 영어 원문에서 새로 옮겼습니다. 시 한 페이지가 달려가는 동안 처음에는 배가 나오고, ...

W. H. 데이비스, 잠시 멈추어 바라볼 시간이 있나요 — 「여유(Leisure)」를 읽으며

 산길을 걷다 보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발밑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물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면 작은 개울이 흐르고, 수면 위에서는 빛이 잘게 부서집니다.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걷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그런 풍경을 곁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발은 숲길을 걷는데 마음은 아직 끝내지 못한 일에 가 있습니다. 길은 비슷했을 텐데, 돌아와 기억하는 것은 날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걷는 동안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웨일스 시인 W. H. 데이비스의 「여유」는 나무 아래에 서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는 삶을 묻습니다. 시 속에는 대단한 구경거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풀밭의 동물들, 먹이를 감추는 다람쥐, 한낮에 반짝이는 시냇물. 조금만 머물면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밤하늘처럼 별이 가득한 시냇물’이라는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별을 보려면 밤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데이비스는 한낮의 물 위에서 별을 봅니다. 그가 바라본 풍경을 따라 짧은 시 한 편을 천천히 읽어봅니다. Leisure William Henry Davies (1871–1940) 🔊 Read Poetry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And stare as long as sheep or cow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No time to turn at Beauty’s glance, And watch her feet, how they can dance. No time to wait till her mouth can Enrich that smile ...

Edwin Arlington Robinson, 모두가 부러워했던 사람 ― 「Richard Cory」를 읽으며

  사람을 멀리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말투도 반듯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그 삶도 우리보다 한결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Edwin Arlington Robinson의 「Richard Cory」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시는 겨우 열여섯 줄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 도착하고 나면, 앞에서 읽었던 열다섯 줄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Richard Cory Edwin Arlington Robinson (1869–1935) 🔊 Read Poetry Whenever Richard Cory went down town, We people on the pavement looked at him: He was a gentleman from sole to crown, Clean favored, and imperially slim. And he was always quietly arrayed, And he was always human when he talked; But still he fluttered pulses when he said, “Good-morning,” and he glittered when he walked. And he was rich—yes, richer than a king— And admirably schooled in every grace: In fine, we thought that he was everything To make us wish that we were in his place. So on we worked, and waited for the light, And went without the meat, and cursed the bread; And Richard Cory, one calm summer night, Went home and put a bullet through his head. 시를...

Walter de la Mare, 달빛 아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문 ― 「The Listeners」를 읽으며

 밤늦은 길을 걷다가 불빛도 없는 오래된 집 앞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문을 두드려봅니다.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이 정말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Walter de la Mare의 「The Listeners」는 바로 그런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시를 읽는 동안 특별히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문이 열리지도 않고, 유령이 나타나지도 않지요. 그런데 시가 끝난 뒤에도 그 집과 달빛과 문 앞에 서 있던 여행자의 모습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마 이 시의 묘한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The Listeners Walter de la Mare (1873–1956) ‘Is there anybody there?’ said the Traveller, Knocking on the moonlit door; 우리말로 읽기 “거기 누구 있습니까?” 여행자가 말했습니다. 달빛이 비치는 문을 두드리면서요. 여행자는 말을 타고 깊은 숲속의 집 앞에 도착합니다. 말은 고요한 숲 바닥의 풀을 뜯고 있고, 오래된 탑에서는 새 한 마리가 갑자기 날아오릅니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창가에도 사람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곳에 ‘phantom listeners’ ,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묘한 청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두운 계단과 텅 빈 홀 어딘가에 서서 여행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대답하지 않은 채로요. “거기 누구 있습니까?” 이 시의 첫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Is there anybody there?” 누군가의 집을 찾아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면서 평범한 질문이 갑자기 이상해집니다. ...

John Keats, 아직 쓰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은데 ― 「When I Have Fears」를 읽으며

  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읽고 싶은 책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젊을 때는 시간이 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온 시간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John Keats가 「When I Have Fears」를 썼을 때는 스물두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시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모두 쓰기 전에 삶이 끝나버리면 어떻게 할까. 이 짧은 소네트는 바로 그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Keats는 이 작품을 1818년 초에 썼으며, 실제로 그는 불과 몇 해 뒤인 1821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만 이 시를 훗날의 죽음을 예견한 작품처럼 읽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시 속에서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 아직 펼쳐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이니까요. When I Have Fears John Keats (1795–1821) 🔊 Read Poetry When I have fears that I may cease to be Before my pen has gleaned my teeming brain, Before high-pilèd books, in charactery, Hold like rich garners the full ripened grain; When I behold, upon the night’s starred face, Huge cloudy symbols of a high romance, And think that I may never live to trace Their shadows with the magic hand of chance; And when I feel, fair creature of an hour, That...

George Eliot, 혼자 살던 남자의 집에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 「Silas Marner」를 읽으며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혼자인 것이 익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믿지 않아도 되고, 기대하지 않아도 되고, 실망할 일도 없는 생활이지요. 처음에는 외로웠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고요함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George Eliot의 『Silas Marner』에 나오는 Silas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에게도 처음부터 사람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사람을 믿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의심받은 뒤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Silas는 마을을 떠나 Raveloe라는 곳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베를 짜며 혼자 살아갑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하루하루 베틀 앞에 앉아 일을 하지요. 그리고 그가 세상 대신 붙잡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금화입니다. 처음에는 노동의 대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면 Silas는 모아둔 금화를 꺼내어 바라보고, 만지고, 세어봅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금화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적어도 그에게 금화는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금화만 남은 방 그런데 어느 날 그 금화마저 사라집니다. 누군가 그의 집에 들어와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훔쳐간 것입니다. Silas에게는 단순히 돈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람을 잃었고, 공동체를 잃었고, 믿음을 잃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것까지 없어져 버린 셈이지요. 텅 빈 자리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 대신 돈을 붙잡았는데, 그 돈마저 사라진 뒤에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뜻밖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Silas의 집 문은 열려 있었고, 눈길을 헤매던 아주 어린아이가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