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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Louis Stevenson — 아무 일정 없이, 어디론가 걷고 싶은 날, 「방랑자」

  집을 나서면서 어디까지 갈지 정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늘 걷던 길을 따라가다가 평소에는 지나쳤던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다음 모퉁이까지 가 보기도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할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처음에는 머릿속을 따라오던 일들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지요.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잠깐은 발밑의 길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머뭅니다. 여러분도 무언가를 해결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동안 걸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진 적 있으신가요. 오늘 읽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방랑자」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산책을 나서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는 목소리입니다. 별이 보이는 덤불을 잠자리로 삼고, 강물에 적신 빵을 먹으며, 머리 위의 하늘과 앞에 놓인 길을 원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왜 이 사람이 그토록 길을 원하는지 잠시 함께 걸으며 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게는 하늘과 길을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내가 바라는 것은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발밑의 길뿐. 두 행을 읽으면 풍경이 단순해집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생각하던 마음으로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꾸 줄여 갑니다. 끝에 남는 것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자리와 그 위로 펼쳐진 하늘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꼭 새로운 장소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그 말에 함께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원문 만나기 The Vagabond (To an air of Schubert) 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 🔊 Read Poetry Give to m...

Kate Chopin, 단 하루만 나를 위해 살 수 있다면 ― 「A Pair of Silk Stockings」을 읽으며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다 보면 이상한 습관이 하나 생기기도 합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내가 아닌 것 입니다. 아이에게 필요할까. 가족에게 도움이 될까. 집에 먼저 사야 할 것은 없을까. 그러다 보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사는 일에는 자연스럽게 이유가 필요해집니다. 꼭 필요한가? 조금 더 참아도 되지 않을까? Kate Chopin의 「A Pair of Silk Stockings」에는 그런 삶에 익숙해진 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Mrs. Sommers. 어느 날 그녀의 손에 뜻밖의 15달러 가 생깁니다. 지금의 화폐 가치와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녀에게는 평소 쉽게 생기지 않는 여윳돈입니다. 그녀는 밤늦도록 그 돈을 어떻게 쓸지 계산합니다. 아이들에게 새 옷을 마련하고, 신발을 사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면 15달러를 아주 알차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은 계획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백화점에서 아주 작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녀의 손끝에 우연히 실크 스타킹 한 켤레 가 닿습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하루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A Pair of Silk Stockings Kate Chopin (1850–1904) 이 작품은 1897년에 발표된 짧은 단편입니다. 처음의 Mrs. Sommers는 뜻밖의 돈이 생긴 것을 기뻐하지만, 그 기쁨은 곧 가족을 위한 계획으로 바뀝니다. Chopin은 이렇게 씁니다. “Little Mrs. Sommers one day found herself the unexpected possessor of fifteen dollars. It seemed to her a very large amount of money.” “어느 날 작은 체구의 소머스 부인은 뜻밖에도 15달러를 손에 쥐게 되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아주 큰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돈을 쓰기 전부터 행복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갖게 될...

이상, 거울 속의 나는 왜 나와 악수할 수 없을까 ― 「거울」을 다시 읽으며

거울 앞에 서면 내가 보입니다. 얼굴도 같고, 옷도 같고, 내가 움직이면 그 사람도 움직이지요. 그런데 손을 들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나는 오른손을 들었는데 거울 속의 사람은 왼손을 듭니다. 내가 웃으면 그도 웃지만,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분명 나인데 나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상은 바로 이 익숙하면서도 이상한 순간을 시로 가져옵니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는 거울 앞에서 그는 묻는 듯합니다. 거울 속에 있는 저 사람은 정말 나일까요?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거울」 이상 (1910–1937) 이 시는 1933년 『가톨릭청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서도 「거울」 전문과 함께 발표지를 『가톨릭청년』 1933년 10월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 Read Poetry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 이상의 「거울」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마주 세우며 자의식과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두 자아가 끝내 합쳐질 수 없는 모습을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첫 구절은 너무 당연한 말로 시작합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그렇지요. 거울은 모습을 비출 뿐 소리를 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