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을 떠올릴 때,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생각나는 날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던 말투나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웃던 소리 같은 것들입니다. 사진에는 남지 않는 그 소리가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오늘 읽을 테니슨의 시에는 여러 소리가 들립니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함께 노는 아이들의 외침, 배 위에서 부르는 젊은 뱃사람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들 사이에서 시인이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 하나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는 그렇게 바다의 소리와 한 사람의 침묵을 나란히 놓습니다. 열여섯 행의 짧은 시이지만, 다 읽은 뒤에도 파도 소리가 조금 오래 남습니다.
다시 잡고 싶은 손,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
But O for the touch of a vanish’d hand,
And the sound of a voice that is still!
아, 그러나 사라진 손의 감촉이 그립구나,
이제는 잠잠해진 그 목소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말은 넓고도 막연합니다. 그런데 손의 감촉과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그리움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생깁니다. 함께했던 모든 일을 되돌려달라는 말보다, 그 손을 한 번만 더 잡고 싶다는 말이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테니슨은 젊은 시절 가까운 친구 아서 헐럼을 잃었습니다. 이 시도 그 상실과 연결해 읽혀 왔습니다. 하지만 시 안에는 친구의 이름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라진 손과 멎은 목소리만 남아 있습니다. 그 빈자리에 독자도 자신이 그리워하는 사람을 조용히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원문 만나기
Break, Break, Break
Alfred, Lord Tennyson (1809–1892)
Break, break, break,
On thy cold gray stones, O Sea!
And I would that my tongue could utter
The thoughts that arise in me.
O, well for the fisherman’s boy,
That he shouts with his sister at play!
O, well for the sailor lad,
That he sings in his boat on the bay!
And the stately ships go on
To their haven under the hill;
But O for the touch of a vanish’d hand,
And the sound of a voice that is still!
Break, break, break
At the foot of thy crags, O Sea!
But the tender grace of a day that is dead
Will never come back to me.
※ ‘vanish’d’는 ‘vanished’를 줄여 쓴 표기입니다.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우리말로 읽기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너의 차가운 잿빛 바위 위에서, 오 바다여!
내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내 혀가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 어부의 아들은 좋겠구나,
누이와 놀며 소리치는 저 아이는!
아, 젊은 뱃사람은 좋겠구나,
만 안의 배에서 노래하는 저 사람은!
의젓한 배들은 나아간다,
언덕 아래 제 항구를 향해.
아, 그러나 사라진 손의 감촉이 그립구나,
이제는 잠잠해진 그 목소리가!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너의 바위 절벽 아래에서, 오 바다여!
그러나 사라진 어느 날의 다정한 아름다움은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으리.
바다는 소리를 내는데
첫 행은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합니다. “Break, break, break.” 짧은 말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모습에서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한 번 밀려왔다 물러나고, 다시 밀려오는 움직임입니다.
‘부서져라’라는 우리말은 다소 거칠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다를 향해 파도가 깨져 흩어지는 움직임을 계속하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원문의 짧고 단단한 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화자는 자기 안의 생각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바다는 끊임없이 소리를 내는데,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합니다.
슬픔이 깊을 때에는 할 말이 없어서 조용해지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거나, 어느 말도 마음에 꼭 맞지 않아 침묵하게 되기도 하지 않을까요. 첫 연에서는 파도의 소리 옆에 그런 막막함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슬픈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는 바람을 남깁니다. 독자는 그 짧은 망설임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하루는 계속됩니다
둘째 연에는 아이와 젊은 뱃사람이 등장합니다. 아이는 누이와 놀며 소리치고, 뱃사람은 배에서 노래합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고도 즐거운 하루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좋겠구나”라고 말합니다. 부러움이 담긴 말처럼도, 자신과는 멀어진 세계를 바라보는 말처럼도 들립니다. 다만 그들의 즐거움을 탓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곁에서도 아이는 놀고, 노래는 이어집니다.
마음에 큰일을 겪고 난 뒤 밖에 나섰을 때, 거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아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으실까요. 나에게는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 가게는 문을 열고,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고,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그 익숙함이 잠깐 서운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도 바깥의 삶과 화자의 마음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릅니다. 아이와 뱃사람의 목소리는 밝지만, 그 밝음이 화자의 슬픔을 지워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자신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합니다.
배에는 돌아갈 항구가 있습니다
셋째 연에서 배들은 언덕 아래 항구를 향해 나아갑니다. ‘stately’라는 말에는 의젓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배들은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도 제 갈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항구라는 말에는 도착과 쉼의 느낌이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배가 마침내 머무를 자리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는 곧바로 사라진 손과 잠잠해진 목소리로 돌아옵니다.
배에는 닿을 곳이 있는데, 이 그리움은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편지를 쓰거나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바라는 만남에는 그런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는 손과 목소리를 부르는 데서 멈춥니다. 그 짧은 탄식 앞에서는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잠시 머물게 됩니다.
특히 ‘a voice that is still’의 ‘still’은 여기서 ‘고요한, 소리가 멎은’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분명히 들었던 목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다는 사실이, 그 목소리가 얼마나 익숙했는지를 거꾸로 떠올리게 합니다.
돌아오는 파도와 돌아오지 않는 하루
마지막 연에서도 파도는 부서집니다. 첫머리와 같은 말이 다시 들리지만, 그 사이에 사라진 손과 목소리를 만났으므로 처음과 똑같이 듣기는 어렵습니다.
파도는 돌아옵니다. 비슷한 모습으로 밀려와 같은 바위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한 사람과 함께 보냈던 날은 그 방식으로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시는 그 차이를 마지막 두 행에 남깁니다.
‘the tender grace’는 한마디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다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옮겼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보다, 그 사람이 함께 있었기에 하루에 깃들었던 온기와 부드러움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길을 걷고, 별일 없이 헤어진 하루였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시는 그날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말로 끝납니다. 서둘러 위안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남겨두기에, 함께했던 시간의 다정함도 더 오래 마음에 머뭅니다.
기억 속에서 다시 들리는 말
시를 읽고 나면 바다보다 목소리가 먼저 떠오릅니다.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도, 말끝을 맺던 습관이나 웃음이 섞이던 순간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움은 때로 그렇게 작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손을 잡았던 감촉 하나가 많은 시간을 데려옵니다.
오늘 이 시를 읽으며 문득 생각난 목소리가 있으실까요. 어떤 말이었는지 서둘러 찾아내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잠시 그 말투를 떠올리는 동안, 지나간 어느 날의 다정함도 함께 가까워질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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